자동차번호판의 뒷자리 숫자가 4400이던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관용차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던 충남의 한 축제 개막식에 축사를 하러 안 지사가 연단에 올라간 사이 운전기사가 환기를 위해 뒷문을 활짝 열어놓았던 듯한데, 인상적인 것은 차량 내부 인테리어가 아니라 조수석의 뒷자리에 놓여 있던 두툼한 책 두 권이다. 지금 그 책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권당 500페이지는 족히 넘을 두 권은 정치사상사와 역사철학 분야의 책으로 기억된다. 일반대중들이 가볍게 읽자고 집어들 책은 절대 아니다.

그 두 권의 책은 안 지사가 행사·회의 참석과 결재 사이사이 또는 퇴근 후 도지사 공관에서 혼자 무엇을 할지 알려주는 실마리로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에 있다. 서울에 사는 가족과 떨어져 도지사 공관에 혼자 사는 젊은 사십대 도지사가 무얼 하는지 분단위, 시간단위로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하는 기관들의 촉수가 주변에 깔려 있다는 점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선택한 것은 책읽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시골의 도지사이기에 중앙에서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작년까지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나면 폭넓은 책읽기를 하고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심화시켰으리라고, 짐작한다. 그 결과물은 뜨문뜨문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에 나오곤 한다.

그리고 요즘 목도하는 바와 같이 다른 대선후보들과는 결이 다르게 들리고 깊이가 다른 약속과 주장을 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그런 자가 심화학습의 결과물이라고 보게 된다. `통섭`이라는 같은 말을 해도 천착의 심도가 다르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런 행위의 결과가 아닐까. 최근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선의`(善意)도 정치·경제, 역사·철학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학 책까지 섭렵했을 듯한 이런 자가 심화학습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부산대학교 강연에서 이 선의의 전제는 대화였고, 적대적 위치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선의를 갖고 마주해야만 가능하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랜 책읽기와 통찰에서 비롯된 확신인데, 안 지사는 박근혜 대통령을 언급한 점은 사과를 하고 물러섰어도, 이런 전제와 선의는 거둬들이지 않았다. 안 지사가 지난 12일자 대전일보와 한 단독인터뷰에서 "나는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한 진보주의자다"라고 단언한 점은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안 지사는 이런 관점과 태도가, 추락 경고등이 켜진 한국사회가 위기를 벗어나 안정된 사회로 바뀌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방법론이라고 강하게 확신하는 듯하다. 많은 국내외 사회과학자들이 하는 진단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어서 그의 확신과 논리는 틀린 것은 아니다.

안 지사는 이 같은 확신과 논리, 방법론이 탄핵소추 정국을 야기한 현재까지의 한국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한국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거듭해 환기시키지만, 동시에 지금의 한국사회를 벗어나 새로운 한국사회로의 진입을 열망하는 적잖은 이들에게 지지를 주저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미디어를 통해 그의 최근 행보를 접한 이들 사이에서는 대통령보다는 철학교수가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말도 나온다. 이를테면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20세기 지성과 21세기 지성을 애써 구분해 강조하려 했던 태도도 이런 인상을 심어주는데 일조를 한다.

본보 인터뷰에서처럼 좌우, 진보·보수 등 경박하고 기계적인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재단하는 방식을 고수해서는 우리가 열망하는 사회로 바뀔 수 없다는 그의 진단은 옳지만, 과거와 완전하게 결별하고 그 결별을 위한 단호한 행동력과 방법을 제시해주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그저 미적지근한 후보로 보일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그런데도 안 지사는 그의 이런 방법과 논리, 스탠스여야만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전환과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 그는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이를 버릴 생각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험난한 도전에 나선 안 지사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논리와 방법론은 우리 정치·사회에 착근돼 새로운 변화의 모멘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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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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