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그림을 만나 콘텐츠가 되다

그림은 도시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철거를 앞 둔 마을에 예쁜 벽화가 그려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도시 주민들은 마을을 보존하기로 결정한다. 꿈 같은 이야기지만 실화다. 통영항을 바라보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동피랑이 그랬다.

최근 충주시 블로그에 소개된 유순상 작가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유 작가는 충주지역의 소소한 일상을 드로잉(drawing)으로 알리고 있다. 단순히 익숙한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너무 익숙해서, 너무 오래 돼서 잊혀진 `것`과 `곳`을 소묘(素描)하면서 의미를 찾아낸다. 그의 손 끝에서 그림은 스토리로 태어난다. 충주의 그림들은 도시재생, 원도심 활성화로 연결된다.

유 작가는 `청소년과 함께 하는 그림 멘토링`을 구상 중이다. 그 중심 테마에 `도시재생`이 있다. 충주 뿐만 아니라 대전과 충청권 전체의 원도심을 그려 보고 싶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일종의 재능기부다.

◇왜 충주인가? 왜 도시인가?

유 작가가 충주를 그린 이유는 간단하다. 매력적인 곳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매력을 품은 대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바라보는 대상의 느낌과 감정까지 표현하고 싶은 것이 화가다. 그런 작업은 색을 사용하지 않고, 선묘 만으로도 충분했다.

"화실을 시작할 때부터 충주라는 콘텐츠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지난해 여름 충주시의 도시재생대학을 수강하면서 일반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도시재생에 대해 알게 됐고, 충주를 그리는 일이 가치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충주를 `도시 콘텐츠`로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그는 충주풍류문화관, 탑평리 중앙탑공원 초가집, 목계나루 체험관, 옛 충주역 급수탑, 관아공원, 호암지, 지현동 사과나무동네 지도 등을 그렸다. 이 중에서도 충주역 급수탑은 유 작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손꼽는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놓이면서 전국 각지에 건립됐지만 1960년대 후반 디젤기관차가 보급되면서 쓸모가 없는 신세가 됐다. 대부분 철거돼 현재 19개 정도가 남아 있다. 충북선 철도 중에는 유일하게 남았다. 하지만 9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지역 명물은 몇 년 전까지 만해도 고물상에 둘러싸여 있었다. 당연히 시민들은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무관심했다. 그는 고물더미 속에 묻혔던 근대유산을 그림에 담고, 가치를 알렸다. 그 사이 충주시도 인근 부지를 매입해 공원으로 조성했다. 문화재 등록도 신청했다. 도시 콘텐츠 하나가 완성됐다.

◇도시 그림, 증강현실이 되다

유 작가는 최근 충주의 `사과나무 이야기 길`을 소개하는 특별한 지도를 제작했다. `사과나무 이야기 길`은 충주 지현동에 있는 2㎞ 남짓한 골목길이다. 충주 특산물인 사과를 1912년 충북 최초로 재배한 곳이다.

"2014년 생긴 골목길에는 사과를 주제로 한 벽화와 1980-1990년대 옛 풍경이 남아 있어요. 한옥을 개조한 재즈바와 개성을 자랑하는 상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통영의 `동피랑`이나 청주의 `수암골`보다 덜 알려져 있어요. 충주를 대표할 만한 관광지로 손색이 없는데 외면받는데다 상점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지도 제작을 결심했습니다."

유 작가는 인터넷마케팅 업체인 `플랜엠`(planmad.com·대표 박민수)와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VR 장비를 활용해 지현동 골목길의 풍경과 점포의 안팎을 촬영했다. VR영상은 360도로 볼 수 있어 직접 현장에 있는 듯한 영상을 제공한다. 지현동을 가상체험한 사람들이 실제로 지현동을 찾아 생생하게 사과나무 길을 체험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유 작가는 밑그림인 약도 제작을 맡았다. 한옥 등 옛 건물이 즐비한 지현동의 특징을 수채화 기법으로 그려냈다. "세련된 그래픽으로 약도를 그려도 되지만 지현동의 옛 풍경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려고 수채화 기법을 택했습니다."

유 작가는 앞으로 충주를 찾는 배낭여행객을 위한 관광지도를 만들 계획이다. 숙소와 음식점, 주요 관광지 정보를 VR 영상으로 소개해 여행객들이 인터넷을 통해 숙소의 상태를 점검하고, 관광지 등을 미리 답사하도록 도울 계획이다.

◇그림과 청소년이 함께하는 도시재생

유 작가는 요즘 학생, 청소년들에게 관심이 많다. "화실(SOON art studio)을 내고 한 동안 입시미술을 하면서 학생들을 많이 지도했어요. 하지만 `대학 합격`이라는 부담감에 늘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입시미술을 접었어요. 그런데 도시를 주제로 작업하면서 청소년 활동에 관심이 생겼어요. 미술을 학생들의 창의체험활동과 접목하면 좋은 재능봉사활동과 비교과활동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도시를 그리면서 대학 시절부터 간직했던 그림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이 불쑥 튀어나왔다고 고백했다. 대학 시절 막연하게 그림의 공공성, 그림을 활용한 일종의 계몽활동을 구상했는데 도시재생이야 말로 최고의 테마가 됐다는 것이다. 물론 그림 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생각도 컸다. 도시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와 인문학적인 부분을 보완하는 공동 작업이 필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청소년을 주목한 이유다. 도시가 가진 정체성을 청소년들이 가진 다양한 재능으로 구현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미술에 소질 있는 학생이든, 건축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든, 디자인 분야를 전공하려는 학생이든, 소설가가 꿈인 학생이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재능봉사활동을 해보자는 생각이다.

"도시를 종합적인 문화상품콘텐츠로 만들고 싶어요. 이를테면 충주에는 국보6호 탑평리 7층 석탑(중앙탑)이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 북쪽과 남쪽에서 한 날 한 시에 똑같이 출발해서 만난 정중앙에 세운 탑입니다. 주변에는 수안보와 우륵의 가야금, 탄금대, 신립 장군 등의 스토리가 많아요. 학생들과 함께 도시를 그리고, 이야기를 수집하고, 알리는 작업을 하면서 살아있는 교육을 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그의 구상은 충주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대전이나 세종지역 학생들과도 얼마든지 협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와 문화 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다.

권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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