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행 파문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과 한국 대표단의 만남을 헤드라인 뉴스에서 밀어낼 만큼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제 월 스트리트 저널의 보도다. 적어도 충청으로선 그렇다.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지역민들은 말을 잃었다. 경악과 분노를 넘어 참담함으로 곤혹스럽다. 안 전 지사에게 자문위원 임명장을 받은 어느 교수는 파문 직후 "나도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니냐"고 거취를 물어왔다.

맨 처음 안희정을 인터뷰한 게 참여정부 말기의 일이다. 참여정부평가포럼을 만들어 노무현 대통령 집권 5년의 공과에 대한 평가를 시도할 때다. "노 대통령은 자주 뵙느냐"라는 질문에 "더러…"라고 말했다. "주말에 부르시곤 하죠. 같이 담배도 피우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눕니다." 겸손하게 정의와 국민 통합을 언급할 때 노 대통령 왼팔로 불린 그의 표정엔 신뢰감과 더불어 회한 같은 게 엿보였다. 폐족(廢族)이라며 몸을 낮추는 가 싶더니 2010년 지사로 화려하게 당선 됐고, 유력한 잠룡으로 부상하기 이른다.

인권과 소통의 행보를 실천해온 안 전 지사의 민낯은 8년 만에 드러났다. 충남도 210만 명의 얼굴인 도백(道伯)이 보여준 행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수행비서를 지낸 김지은 씨는 스위스 출장 길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미투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가던 지난달 25일에도 반복됐다고 한다. 안 전 지사는 김씨 폭로 11시 간 전쯤 충남도청에서 "미투운동은 남성중심적 성차별 문화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상찬한 바 있다. 위선과 표리부동에, 믿었기에 배신감이 더 크다.

충남의 안바마(안희정+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는 차기 유력 대권주자에서 만 하루도 되기 전에 피의자로 전락했다. 지지자들은 완전히 돌아섰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성토의 글이 넘쳐 난다. 지사직을 물러났지만 엄벌을 피하지 못할 게다. 피해자가 고소장을 제출한 것에 맞춰 성역없는 수사가 필수다. 무엇보다 안 전 지사는 잠적해 침묵할 게 아니라 직접 `영혼의 맨몸`을 보여줘야 할 때다. 피해자에게 무릎을 꿇고, 도민과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이자 예의다. 변호사 선임이 그보다 급한 일인가.

시선은 지방선거 후폭풍으로 옮겨간다. `안희정의 친구` 더불어민주당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은 선거 운동을 잠정 중단했다. 함께 도지사 경선에 나선 양승조 국회의원과 복기왕 전 아산시장도 운신 폭이 좁아졌다. 열세로 속수무책이던 자유한국당은 반격 채비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 성일종 충남도당 위원장은 "민주당이 도지사 후보를 안 낸다면 모양새가 좋을 것"이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정당·정파의 정치공학으로 사태를 재단해 움직이는 건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사태를 한번 들여다보자. 참담한 현실에 대한 복기라는 건 성찰과 지적 용기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고통스런 과정이다. 하지만 `업무상 지위를 이용한 간음`이 자행될 때 `몰랐다`라며 발뺌한다고 해서 주변 인사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질까. 피해자의 손을 잡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데 이 또한 정상이 아니지 않은가. 측근 인사와 도정 운영의 독주를 막지 못해 사태를 부른 것이란 비판에 도 공무원이나 의회, 언론이 입을 열기 어렵게 됐다.

한편으론 충청대망론 기대감으로 환호하다가 억장이 무너진 지역민들의 분노와 상실감이 장기화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안희정 파문으로 양반의 고장이자 독립운동의 본산이라는 충청의 자부심과 긍지가 티끌만큼이나 훼손돼선 안 된다는 말들이 나온다. 당연한 지적이다. 다만, 유책사유가 없다고는 해도 괴물을 키운 게 아닌지 곤혹스런 지역민이 적지 않을 듯 하다. 사실은 그 대가를 하루아침에 청산하기 녹록지 않다는 게 더 난감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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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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