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1985년이었다. 50대 이상은 기억하겠지만 당시는 해마다 10% 내외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변해가던 시절이다. 대통령은 국정의 핵심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를 주택 200만 호 건설로 제시했다. 집 짓는 일이 나라에서 최고 중요한 일이었고 전국토에 중장비 소리가 가득했다. 대전의 둔산이나 송촌지구 신도시개발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논밭이 아파트 단지가 되고 야산은 집터로 변모했다. `내집`에 대한 국민의 욕구와 정부의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부작용은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수요가 많다 보니 집값의 상승세도 가팔라서 10% 중반대의 높은 대출이자로 주택을 매입해도 몇 년 뒤 이익을 보고 팔거나 더 큰 집으로 옮길 수가 있었다. 어지간한 신용도만 유지하면 2%대 금리가 보통인 요즘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들지만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부동산만 호황을 누린 게 아니었다. 주택시장 활황에 힘입어 단기간에 대기업 반열에 오른 건설회사와 금융권도 사업영역을 넓히면서 우수인력 확보경쟁에 나섰다. 그 바람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학졸업자는 취업걱정을 하지 않았고 급여가 훨씬 높았던 민간기업이 공무원이나 공기업보다 선망 받는 직장이었다.

이렇게 성장하면 일본을 앞지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성급한 축배를 들기도 했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관차를 세운 것은 1997년말에 닥친 외환위기였다. 이름난 기업의 부도소식이 신문지면을 가득 채웠고 자신감 없어 보이는 관료들이 TV에 나와 낮은 목소리로 대응책을 설명했지만 사회분위기는 끝 모르게 추락했다. 그렇게 무너지는가 싶었지만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딛고 불과 2년 정도 지나면서 IMF관리경제를 졸업했고, 꾸준한 성장의 덕분으로 올해는 선진국의 기준이 되는 1인당 GDP 3만 달러를 돌파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외환위기 이후 20여 년이 지나며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모험과 도전이 아니라 유지와 안정을 권하게 됐고 수성(守城)이 공성(攻城)보다 중요한 가치가 됐다. 수십만 명의 대졸자가 전공과 무관하게 두꺼운 행정학 문제집을 보며 공무원이나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공직이 취업준비생들의 선호직종 최상위에 오른 이유는 안정성 때문이라고 한다. 안정적인 직장을 찾는 구직자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경제의 발전과정을 보면 종합상사, 증권사, 조선소, 자동차회사, 통신회사 등이 번갈아 가며 취업시장에서 각광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지금 선호도가 높은 공직이 미래에도 과연 가장 좋은 직종으로 남을지는 누구도 자신하기 어렵다. 한때는 말뚝만 박아도 집이 팔리고 금만 그어도 땅이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일부 영역에서는 공기업의 배타적 독점이나 과점이 제도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보의 균등화가 이루어지고 규제완화의 바람이 강하게 불게 되면 진입장벽이 허물어지거나 훨씬 낮아질 것이고 그 여파로 공기업의 `안정성`도 흔들리게 되리란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마윈(馬雲) 알리바바 회장이 영어교사에 만족하고, 제프 베조스가 아마존 창업 대신 은행원으로 남았다면 어땠을까?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엘런 머스크(테슬라)가 10년, 20년전에도 꽃길을 걷고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20년 후 어떤 직종이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긍지를 누릴지는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어김없이 올 봄에도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취업시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이 나 같은 기성세대의 잘못 때문은 아닌지 반성하면서 용기와 도전으로 모두의 미래가 밝게 빛나길 기원해 본다. 유영균 대전도시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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