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혐오·배제는 정당성 없다

제주도를 찾은 예멘 난민들을 두고 우리 사회가 소란스럽다. 한편의 사람들은 이들을 맞아들여 보호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들을 보호하는 데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난민의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시 이를 위한 정부의 대책을 요청하고 있다.

난민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입장은 인지상정의 발로이다. 그 해당자가 누구이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제적 규범이 되고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은 그 상식에 기초해 있다. 반면에 난민의 유입을 막고자 하는 입장은 국민이 우선이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국민의 안전을 해칠 수도 있는 요인은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보호를 내세우는 것은 그럴 듯해보일지 모르지만,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나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안전 여부에 대해서는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 한국은 국제연합(UN)이 제정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1992년에 가입하였을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 가운데서는 드물게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해 그 이듬해부터 시행 중에 있다. 예멘 난민들이 한꺼번에 제주도에 들어오게 된 것도, 제주도가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던 조건도 있었지만 한국이 난민을 보호하는 법을 갖고 있고 국제 규범을 지키고 있다는 것 또한 한 요인이었다.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고자 한 난민들에게 한국은 보호처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받은 것이다. 기뻐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 난민들이 대거 들어옴으로써 국민의 일자리를 앗아가고 범죄를 유발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리며 이들의 유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배제의 논리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전문가들과 제주도 현지인들이 말하듯 일자리를 위협할 만큼 문제시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난민들로 인한 범죄 역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낯선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허위사실과 결부시켜 이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펼치는 것을 과연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한 종교인으로서 낯부끄럽기 그지없다. 가짜 난민이라느니, 이슬람을 전파할 목적으로 대거 들어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먼저 경계하고 보는 `신앙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착잡해진다.

성서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요체로 하고 있고, 여기서 이웃 사랑은 가장 곤경에 처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것은 상식에 해당한다. 놀랍게도 성서는 기본적으로 자기 삶의 근거지를 벗어나 떠돌던 `거류민`과 `나그네`의 의식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을 나타내는 은유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성서의 신앙세계를 형성한 사람들의 실제 삶의 정황을 반영한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떠돌이였다. 그 후손 히브리인들은 거대한 제국 이집트에서 낯선 이방인으로서 종살이하였다. 그래서 성서는 곳곳에서 이방인과 나그네들을 돌보고 그들과 더불어 좋은 것을 나누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방인과 나그네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되돌아보라는 것을 말한다. 예언자들은 그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고 일깨웠다. 더욱이 성서는 긴급한 위기에 처한 `난민`들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도 태어나자마자 학살을 피해 난민이 되었다가 구출되어 평화의 구세주가 되었다. 최후심판 이야기(마태 25장)에서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했느냐"고 묻는다.

사실을 오도해가며 국민을 위한다는 듯 난민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펼치는 것도 위험하지만, 신앙을 명분으로 또는 성서를 근거로 하여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펼치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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