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5년 전인 2003년 3월 21일, `충격과 공포`로 명명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작전은 불과 20일 만에 이라크 군대를 궤멸시켰다. 후세인이 자랑하던 20만명의 최정예 공화국수비대는 5일을 버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해 5월 1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 비행기로 착륙해 "임무완수(Mission Accomplished)"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미국은 기나긴 게릴라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 전쟁은 2조 달러에 육박하는 전쟁비용과 3만 6천명이 넘는 전사자·부상자를 포함하여, 미국의 대외전략에 유무형의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훗날 부시는 성급한 `임무완수` 선언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적대세력`으로 불리는 반란군들과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 간의 격렬한 유혈충돌이 한창이던 2005년 1월 초, 바그다드 다국적군사령부(MNF-I) 한국군 협조단장으로 부임한 필자는 이라크 정부의 인사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도무지 `시간약속`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몇 날 몇 시,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중간에 수시로 약속시간을 환기시키는 수고를 기울여도, 제 시간에 나타나는 법이 없었다.

두 세 시간 늦는 것은 예사고, 늦게 나타나도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늘 화사한 웃음과 함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인샬라"였다. `신의 뜻`이지 자기가 늦고 싶어 늦은 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서 때때로 이들은 농반진반으로 "너는 시계를 갖고 있지만, 나는 시간을 갖고 있다(You have the watches, but we have the time)"는 점을 환기시켜 주었다.

올해 4월 15일,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 화학무기 관련시설에 대한 미국, 영국 및 프랑스 3개국의 공습이 끝난 직후, "완벽한 공습"을 자화자찬하며 "임무완수"를 선언했다. 하지만 아직도 시리아에서는 내전이 한창이다.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최초의 미·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미국에 도착한 트럼프는 트위터에 "북한으로부터 더 이상의 핵위협은 없다"며 안심하고 "푹 주무시라"는 글을 올렸다.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었다면서 또 한 차례 `임무완수`를 선언한 것이다.

미·북 정상회담 이후부터 비핵화 시간표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정상회담 직전인 6월 14일,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만료시점인 2020년을 비핵화 마감시한으로 못 박았다. 폼페이오는 국무장관 취임 일성으로 종전의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 핵폐기)보다 업그레이드 된 것처럼 보이는 PVID(P: 영구적)라는 새로운 단어를 구사해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미·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 비핵화가 `기정사실`이 된 것 같은 착시현상이 나타났다. 그동안 조심스럽게 거론되던 종전선언, 평화협정체결, 미·북 수교 같은 메가톤급 사안들을 둘러싼 논의도 거침없는 기세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막상 이 모든 것들의 대전제인 북한 비핵화는 안개 속에 빠져 길을 잃은 모습이다.

임기 내에 끝낼 것처럼 기세를 올리던 트럼프 대통령이 돌연 비핵화가 "원하는 것보다 더 긴 과정"이 될 수 있다고 꼬리를 내렸다.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북한 비핵화에 "시간표가 없다"며 뒷걸음질 쳤다.

이쯤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이 불확실하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임기가 정해진 트럼프 대통령의 `시계`가 30년 이상을 내다보는 김정은의 `시간`을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조바심을 낼수록 김정은은 더욱 느긋한 페이스로 대응할 것이다.

최근 판문점 유해송환 협상에서 미국 측이 바람맞은 사건은 `시간`을 가진 자의 여유를 상징한다. 북핵위협이 사라졌다며 성급하게 `임무완수`를 선언한 트럼프의 경솔함이 앞으로 또 어떤 문제들을 일으킬지 걱정이 앞선다. 트럼프에게는 시간이 자기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더 큰 재앙을 예방하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송승종 대전대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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