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화폐는 정부의 강제력에 의해 법적 지불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시스템이자 일정 액수를 나타내는 사회적 약속이다. 경제학자 케인스(J. M. Keynes)가 "돈은 문명의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오래된 유물"이라고 말했듯 화폐는 `제공되는 것` 또는 `욕망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가치기준이자 교환의 매개체이다. 물물교환의 불편함에서 자연스럽게 출현한 화폐는 인간의 상상력이 포괄적으로 담겨진 다양한 상징성의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화폐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고유한 가치로서의 국가 정체성을 나타낸다. 세계 각국의 은행권 디자인엔 어떤 상징성과 의미가 담겨 있는지 살펴보자. 미국 `행운의 2달러`는 1982년 미 연방준비은행(Fed)이 최초로 2달러 지폐를 발행하면서 시작됐다. 2달러 지폐는 통용수단보다는 수집용으로서의 가치가 더 있었다. 이는 서부 개척시대 금을 찾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났던 사람들이 긴 여정의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인해 유난히 숫자 2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은행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선 오래전부터 여성이 화폐 속 인물로 등장했다.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1953년 왕이 되었을 때 영국의 식민지는 50개가 넘었다. 현재의 영국연방은 영국을 중심으로 캐나다, 호주 등 옛날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로 구성된 연합체이다. 이 가운데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10여개 국가는 영국연방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뜻으로 은행권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얼굴을 넣어 발행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캐나다, 호주, 홍콩 등 세계 33개국의 화폐에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국가의 화폐에 영국 여왕이 등장하는 이유는 영국이 영연방의 맹주로서 한때 세계를 지배했으며 아직까지도 영연방 국가의 수가 50개를 넘기 때문이다.

세계의 지폐가운데 가장 많은 언어가 표기된 은행권은 어느 나라 돈일까. 바로 인도 은행권이다. 인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힌디어, 영어, 벵골어, 타밀어 등 공식적으로 인정된 공용어만도 15가지나 된다. 지방 고유 방언 등 알려진 언어를 모두 합치면 약 1,660개종에 달한다고 한다. 현재 인도에서 유통되는 5권종의 은행권에는 액면 금액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뒷면 왼쪽에 헌법상 공용어인 15개 언어가 표기돼 있다.

호주 은행권은 호주를 연상시키는 캥거루만큼이나 은행권의 재질과 인물 배치가 색다르다. 우리나라는 물론 대부분 국가에서 은행권 용지의 원료로 촉감이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강하며, 잉크가 잘 스며드는 면(cotton)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하지만 호주는 호주연방과학연구소에서 개발한 폴리머(polymer)를 활용해 1988년 세계 최초로 플라스틱 은행권을 발행했다. 호주 원주민이 그려져 있는 이 은행권은 종이 지폐보다 수명이 길고 위조가 어렵다는 장점이 있지만 소재 특성상 열에 약하고 한번 접히면 잘 펴지지 않는 단점도 있다.

호주 은행권은 또 건국이념인 평등주의 아래 인물의 배치가 철저히 남녀평등을 유지하고 있다. 은행권 앞면에 여성 인물 초상이 있으면 뒷면에는 남성 인물 초상이, 반대로 앞면이 남성 초상이면 뒷면에는 여성 인물 초상이 배치된다. 지구상에 수많은 나라가 있듯 세계에는 수많은 종류의 돈이 있다. 나라마다 은행권에 표현된 상징적 의미는 한 나라의 고유한 기호이자 자산이기도 하다.

<김재민 한국조폐공사 디자인연구센터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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