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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이야기] 본래의 것과 눈에 익은 것

2018-10-11기사 편집 2018-10-11 08: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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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적지 않다. 우리는 자주 보아 눈에 익은 것을 원래 그런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 조각상 하면 인체를 절묘한 비례로 묘사하고 있는 흰 대리석 조각상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보아 온 대리석 조각상은 로마시대 복제품이다. 그리스 조각상은 원래 청동으로 주조되었는데 중세에 금속이 귀하자 로마인들이 녹여 버렸다. 대신 정원 등에 장식품으로 쓰기 위해 대리석으로 복제하는 것이 유행했다. 그리스 청동 조각상의 눈은 색깔 있는 돌을 끼웠고 머리카락과 입술은 도금을 한 사실적인 모습이었다. 또 하나 우리가 보는 흰 석재의 '생얼' 그리스 신전은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스 신전은 한국 사찰처럼 붉고 푸른 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부처에게 바치는 불전을 붉고 푸르게 단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 역시 신의 전당인 신전을 화려하게 색칠했다. 흰 대리석 조각상과 '생얼' 신전에 익숙한 우리가 원래의 청동 조각상과 단청 된 신전을 보면 도리어 어색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산초당은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된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1808년부터 해배되었던 1818년까지 생활하며 제자를 길러내고 저술활동을 한 공간이었다. 지금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은 어찌 된 영문인지 '초당'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기와를 얹은 '와당'이다. 1958년 지역민이 중심이 된 '다산유적보존회'가 사라진 옛 초당 대신 기와집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기와집' 초당에 걸려 있는 추사의 '다산초당' 편액은 이 집이 원래의 다산초당처럼 보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지어진 지 이미 반 세기를 훨씬 넘어서면서 어느 정도 고졸한 맛까지 보태져 현재 대중에게는 이 집이 원래의 다산초당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다산과 교류했던 초의가 1812년 그린 다산도(茶山圖)를 보면 원래의 다산초당과 현재의 모습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8년 다산초당을 복원할 때 왜 기와집으로 초당을 복원했을까? 이왕 복원할 바에야 원래의 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에는 초의가 그린 다산도를 몰랐을 수도 있다. 아니면 새로 복원하는 다산초당은 어차피 원래의 것과 같을 수 없으니 아예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 개념으로 초가집보다는 격이 높은 기와집을 택했을 수도 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니 짐작만 할 따름이다.

이미 사라진 옛 유적을 복원하는 데에는 이렇듯 고민이 많다. 옛 유적을 복원하면 볼거리가 생기기는 하나 옛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고 복원한 이미지로 고착되고 마는 부담이 있다. 반면에 사라졌거나 무너진 그대로 두고 그 분위기만 보존하면 열린 상상력으로 각자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볼거리가 없어 공허하기만 할 뿐이라고 불만을 늘어 놓는다.

그리스 신전은 왜 원래대로 울긋불긋하게 색칠을 하지 않을까? 숭례문을 비롯한 옛 건축물에 주기적으로 새롭게 단청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옛 건축물 자체는 과거에 만들어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이미지는 기껏해야 한 두 세대 전 멀지 않은 과거에 형성된 경우가 많다. 숭례문의 경우 해방 후에만 벌써 여섯 번이나 단청을 새로 했다. 1973년에 한 네 번째 단청은 다음 해 서울에서 개최되는 남북적십자회담을 고려한 서울 환경미화사업의 일환이었다. 그리스 신전은 기독교가 공인된 로마시대 이후 그 역할이 멈춘 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폐허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 익었다. 이에 비해 숭례문은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한양도성의 정문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단청 된 모습이 눈에 익어 그 전통이 계속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나 우리 모두 눈에 익은 것에 길들여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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