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억울한 일이 생기거나 임금에게 고할 일이 있을때는 상소제도(上疏制度)`를 이용했다. 그런데 상소는 한자로 써야 했기 때문에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한자를 쓰지 못하는 백성들은 주로 신문고(申聞鼓)를 두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는 자손이 조상을 위한 일이나 아내가 남편을 위한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등의 내용만 쓰게 돼 있어서 신문고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은 백성들은 임금이 지날만한 곳에서 꽹과리를 치거나 관청 문에 글을 써서 붙이고 투서(投書) 등을 활용했다.

상소나, 투서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지만 많은 경우 정쟁의 수단이 돼 정적을 제거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지난해 강압적인 감찰로 자살한 충주 여경(피모씨) 사건이 대표적이다. 피 경사가 갑질을 일삼고 상습적으로 수년간 지각을 반복했다는 동료 직원(A경사)의 투서가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 투서 이후 충북지방경찰청 감찰실은 2개월 동안 피 경사를 조사했고, 피 경사는 지난해 10월 26일 충주시 연수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검찰은 A경사의 투서가 동료 직원을 음해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판단했고 청주지법 충주지원도 "도주 우려 및 범죄의 중대성이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A경사는 "음해가 아니라 정당한 투서였다"며 강하게 부인하고 있어 양측의 억울함은 법적 판단을 기다리게 됐다.

최근 이같은 투서가 대전지역 문화예술계에서도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투서는 출처 없이 특정인을 지목해 그동안의 행적을 고발하는 내용부터, 기관장의 원칙없는 기관운영을 질타하는 내용 등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기술돼 있다. 언론 보도가 잇따르면서 `제보 전화`도 빗발치고 있는 형국이다. 통상 투서는 열개 중 아홉은 허위라고 한다. 내용을 검증할 수 밖에 없어 시간과 인력이 낭비되기도 한다. 애꿎은 투서 탓에 인재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투서가 잇따르고 있다는 것은, 모함당하고 있다는 식의 자기합리화보다는 내부적으로 곪고 있는 곳은 없는지, 어디서 물이 새는지, 원인 제공을 한 것은 아닌지 자기성찰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기 마련이니.

원세연 취재 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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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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