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북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카페에 들어오는 젊은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휴대폰을 꺼내서 휴대폰에 몰두한다. 이는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이 외계인과 교신이라도 하는 듯 엄청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움직인다. 심지어 대화도 문자로 주고받는다고 한다.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어 `휴대폰`이라는 검색어를 찾아본다. `마누라는 속여도 휴대폰은 못 속인다`, `배우자보다도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휴대폰`이라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검색어가 나온다. `핸드폰은 앞으로 얼마나 진화할 것인가?, 5G시대에 나만 시대에 뒤떨어지는 게 아닌가?, 현대인의 눈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고 상상하는 사이에 친구가 왔다. `젊고 멋있어졌어`라고 덕담을 하니 `자넨 눈이 보배란 말이야`라고 응수한다. 기분 좋은 이 말이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돈다.

눈의 중요성을 강조한 속담으로 `몸 천 냥에 눈이 구백 냥` 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눈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눈은 건강의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눈은 카메라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6개의 근육에 의해 움직이는 복합기관으로 빛의 신호를 모아 뇌에 전송함으로 像을 만든다고 한다. 불교에서도 눈으로 수행 계급을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심안(心眼)이라 하여 오안(五眼)이라 표현한다. 결국 수도 상태의 척도가 눈에 달려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눈의 완성을 가리키는 한자성어로 화룡점정 [畵龍點睛]이란 말이 있다. 《수형기(水衡記)》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장승요가 안락사(安樂寺)에 용 두 마리를 그렸는데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눈동자를 그리면 용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용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용이 벽을 차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는 무슨 일을 할 때 최후의 중요한 부분을 마무리함으로써 그 일이 완성되는 것이며, 또한 일 자체가 돋보인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신체의 수많은 기관 중에 유독 눈은 마음의 창이요, 사람의 빛이 된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고교시절 영어 시간에 헬렌 켈러의 `단 삼일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배우고 나서 두 눈 가지고 볼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했던가! 하지만 젊은 시절 나는 왜 혜안을 가지지 못했을까? 불의를 보고도 용기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성서의 말씀처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과거를 뒤돌아보면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왜 그렇게 젊은 시절엔 수 없이 미(美)를 쫓아 다녔을까? 이제는 나이 들어 알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피부 한 껍질의 차이인 것을(Beauty is but a skin-deep.)! 혜안은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이다. 우리가 최고의 경지인 심안은 아니더라도 혜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보면 어떨까? 세상은 보이지 않은 빅브라더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다. 올해는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하는 혜안을 가지고 싶다. 언제나 당신의 눈이 보배라고 덕담을 건네려고 한다. 눈은 무엇이든 본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은 볼 수가 없다. 사물이나 일을 제대로 볼 줄 알고, 판단을 바르게 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올바른 눈이 필요한 때이다. 속지 않는 눈이 필요하다. 완성의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화룡점정의 눈이 필요하다. 맹자(孟子)도 `마음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그렇지 못하면 눈동자가 흐릿하다`라던 말이 새삼스럽다.

정해황(대전교원총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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