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파트타임으로 시작해 아이들을 가르쳐 온 것이 벌써 30년이 됐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했다. 아이마다 색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었고, 장차 이 녀석들이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될까 유쾌한 그림을 그리며 때로는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기도 했다.

`Alice와 시계토끼`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이 만화로 자기를 표현하고 이야기 만들어내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후배가 선물해준 화이트보드를 키 높이에 맞춰 걸어놨더니 그리고 쓰고 지우고, 매일 다양하고 기발하고 발칙한 상상들이 보드를 채웠다. 함께 보고 웃다가 사진으로 남기다가 지워지는 것이 아까워 나중에는 아예 낙서 노트를 마련하게 됐다.

노트 속에서 나는 제자일동으로부터 여러 장의 상장을 받았다. 상장의 내용은 `올해의 우수 범죄자`였다. 위 선생은 꾸준히 안구테러, 패션테러, 고막테러 등 여러 가지 무서운 테러를 감행하였기에 표창한다는 것. 난센스 퀴즈를 냈다가 나이에 맞지 않는 문제를 냈다고 죄목 추가. 간혹 동료 남자 작가에게서 전화라도 오면 `내 키만큼 책을 읽으면 영어가 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패러디해 `내 키만큼 남자를 쌓으면 바람녀가 된다`라든가, 아이들의 발상이라고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키들거렸다. 공개 현상 수배범이 되기도 했다. `이미숙은 가명일 수 있으며, 인상착의로는 머리가 심하게 꼬불거리고 옷을 이상하게 입음. 주위에 예쁜 척 하는 사람 있으면 신고 바람`이라 쓰고, 머그샷(범인 식별용 얼굴 사진)은 최대한 범죄형으로 바꿔 그려놓았다. 새로운 아이들이 다시 예전의 노트를 보고 그대로 따라한다.

오랫동안 아이들과 생활하며 눈 맞추다보니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갈등과 슬픔, 걱정거리들을 공감하고 이해하게 됐다. 내가 어렸을 때는 꽁꽁 언 냇가에서 썰매를 타며 `얼음지치기`도 하고 하굣길에 땅콩도 몰래 뽑아 먹고 밤나무 아래를 지나면서는 책가방이 불룩하게 알밤도 줍고, 끝도 없는 추억을 참 많이 만들었었다. 요즘 도시의 아이들은 학교로, 학원으로 쫓기듯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안쓰럽고 가여운 마음이다. 오늘도 나는 노트의 뒷장을 열어두고 기꺼이 테러리스트가 된다. 함께 있는 동안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날이 추워진다고 하니 조그만 손 꼬옥 잡아주고 예쁜 잔에 코코아라도 내야겠다. 테러리스트가 만들어주는 코코아 맛이 어떠냐고, 짐짓 너스레도 떨면서.

이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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