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옛날 사람은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허준의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정확하며 가계 이력까지 확실하다. 유년기는 불분명 하지만 성년부터는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일반인과 달리 어의라는 신분과 두 명의 임금을 모셨고, 왕 주위에서 치료를 했으므로 확실하게 기록된 면도 있을 것이다.
일례로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고 양예수 등과 함께 선조의 병을 고쳐 호피를 받은 기록도 있다. 또 임진왜란이 발생한 뒤에는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가는데 동행했으며 피난 중에 선조가 아프면 허준이 치료하는 등 동고동락했다. 덕분에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된다.
맨 처음 동의보감을 만들라는 명을 받고 5명이 책을 만드는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서 중단 됐다가 혼자라도 만들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국가에서 만든 것 이지만 완성은 허준이 혼자 한 것이므로 허준의 단독저서로 보는 견해가 많다,
1604년 전쟁이 끝나고 양평군이라는 호성공신을 받고 숭록대부(崇祿大夫, 정1품)를 받으려 했으나 중인이라는 이유로 문인들이 반대해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서야 내려졌다. 계급사회인 조선시대에 중인이 정 1품에 오른 것은 2명이라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말단 공무원에서 국무총리 혹은 부통령이 된 것이다.
1600년 내의원의 책임자인 수의(수석 어의) 양혜수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받았으며, 선조가 승하한 뒤에는 관례에 따라 귀향을 귀향을 가게 된다. 하지만 귀향 덕분에 여유 시간이 많아 져서 동의보감을 완성 할 수 있었다. 이후 광해군이 허준을 사면, 1610년에 동의보감을 완성하고 1615년에 사망했다.
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나 TV 등 미디어를 통해 허준을 접하고 있다. 특히 여러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 졌는데 왕이 아닌 인물로 4번이나 사극이 만들어 진 것은 드물다. 또 드라마로 인해 한의대에 입학한 학생도 상당수이며 2000년 대 초반 한의대 입학 성적이 올라간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또 작가 이은성이 지은 소설 동의보감은 1990년에 나왔는데, 당초 춘하추동 4권으로 출판할 예정이었으나 작가가 사망하는 바람에 상, 중, 하 3권으로 줄여서 나왔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관련 내용이 실렸으며 그동안 몇 십 판을 찍어내서 부도 직전에 처했던 출판사가 기사회생 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구원회 (구원회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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