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달상 작가
류달상 작가
나는 대전시민대학 6년차 강사다. 그동안 수필과 소설창작 등을 강의해왔고 지금은 대전학강좌 중 하나인 `문학으로 만나는 대전`을 강의하고 있다. 나는 이 강좌에 `대전을 읽고 대전을 쓰자`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부제는 `무엇을`보다는 `어떻게`에 방점이 찍혀 있다. `어떻게` 속에서는 편의상 구분한 `읽고·쓰자`라는 두 방향이 동시적으로 간다. `대전을 읽는 것이 곧 쓰는 것이고 쓰는 것이 곧 읽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역설에는 두 방향을 동시에 긍정하는 생성의 동시성이 들어 있다.

대전을 `읽고·쓰자`는 소재나 대상보다는 방법에 초점을 둔다. `무엇을`의 세계는 정착적이고 명사적이다. `어떻게`의 세계는 유목적이고 동사적이다. 유목적이고 동사적인 대전문학은 대전문학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고 습득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엄숙한 계몽학이 아니라 즐기면서 창조하는 도취의 생성학이다.

예를 들어볼까. 조선 중기, 회덕에서 살았던 김호연재는 대전의 문학사가 자랑하는 시인이다. 앞으로 미발굴된 자료를 발굴해낼 수도 있고, 새로운 관점에서 그녀의 문학을 평가하는 연구 성과도 나올 수 있다. 그것들은 `무엇을`에 주안점을 둔 연구다. `어떻게`의 세계에서는 `읽고·쓰자`가 함께 간다.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그녀를 `읽고`, 지금의 선비마을에 사는 여인으로 소환하여 새로운 김호연재의 서사를 `쓰자` 동화도 좋고, 수필도 좋고, 소설도 좋다. 동남아가 고향인 여성도, 68혁명을 치룬 어머니를 둔 프랑스 유학생도 이 서사에 등장시켜보자. 창작하는 사람의 상상은 걸림 없는 자유다.

상상을 더 펼쳐볼까. 계족산에는 용화사가 있다. 용화사상은 미륵사상의 다른 이름이다. 계족산에 어울리는 부처는 어떤 부처일까. 인도에도 계족산이 있다. 불교전설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 마하가섭은 입적 후 계족산으로 들어가 다음 세대 부처인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착안하면 대전의 계족산도 평화와 상생을 염원하는 미륵의 산으로 승화된다. 천 오백년 전 백제와 신라 젊은이들이 쟁패하며 피 흘렸던 계족산에서 미륵의 암시를 `읽고` 남북한과 중국대륙, 동남아를 거쳐 인도까지 이르는 평화의 대서사를 `쓰자` 대전이 삼천의 도시라는 점에 착안하면 어떨까. 대전천, 유등천, 갑천을 따라가며 왕좌의 게임이나 반지의 제왕을 압도하는 SF서사를 `읽고·쓰자` 이런 대전학이야말로 도취의 대전학이 아닐까.

대전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대전을 알아야 한다. 그러할까, 과연? 대전을 공부하라고 채근하고 꾸짖고 엄숙하게 계몽한다고 해서 시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취의 대전학은 시민들을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생성의 주체로 세운다. 물론 우리가 읽고 써야할 대전의 소재 중에는 아프고 어두운 구석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그의 주제들이 모두 즐거워서 도취를 말했을까? 대전문학이 취해야 할 심리적 태도는 교조적인 맹렬함이 아니라 즐거운 도취다. 어떻게? 아주 쉽다. 즐겁게 대전을 읽고 쓰자.

류달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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