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찾아온 무더위 탓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오월은 삼복의 염천치하보다 뜨겁다. 이달의 기억들이 시간의 풍화를 이겨내고 수사학의 유물로 남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에는 아직 오월의 공간들이 마련되지 않았다. 가슴을 데이고도 남을만한 거리의 기록들, 그 페이지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넘친다.

50여년 전 오월, 프랑스는 사생활의 자유를 촉구하는 소르본의 학생들이 촉발한, 화염의 한 시기를 경험한다. 항쟁의 기간에 그때까지 시위의 현장에서 들을 수 없었던 구호들이 터져 나왔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꿈의 열쇠를 가지고 탈옥하라. 혁명은 드골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좌절되었다. 사람들은 프랑스의 68혁명을 `실패한 혁명` `좌절된 혁명`으로 규정한다. 그러할까 과연?

며칠 전, 39년 전의 광주를 추모하는 현장에서 대통령은 한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짧았던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물리적 시간을 엄청나게 상회하는 심리적 시간을 경험했다. 80년 광주의 비극을 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더 준열한 반성과 사죄와 심판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80년 광주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에서 연역해내야 할 어떤 지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진실 규명에 이은 사법적 판단과 단죄는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참사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어떤 영역들을 거느리고 있다.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만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라는 함수가 그것이다.

다시 68의 5월로 돌아가 볼까. 젊은이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구호들 중에 나를 매혹하는 것들이 있다. `보도블럭 아래 모래`, 그리고 `상상력에게 권력을!` 보수정권에 반대하고 나선 젊은이들에게 사르트르를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가세했고, 정치세력도 연대를 제안한다. 보수 정권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권력을 주어야 하나? 당연히 공산당 같은 세력이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상상력에게 권력을! 그들이 외친 보도블럭 아래의 모래는 바로 해변의 백사장이었다. 보도블럭을 깨서 권위주의를 몰아낸 다음 해변의 자유를 만끽하겠다. 정치적인 상상력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다. 그러나 문화적 상상력이라면 다르다. 해변 너머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68의 주역들이 보여준 전혀 다른 차원의 상상력은 오늘에도 이어져 사상적 `영구`혁명의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문화적인 상상력은 시간 초월적 가치를 품는다.

정치로는 문화를 만들 수 없지만 문화로는 정치를 만들 수 있다. 통일 독일의 초대 수상인 테오도르 호메스의 말이다. 오월광주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날의 희생자들을 능멸하고 공격하여 권력을 취하려는 세력들에게 우리는 말해야 한다. 오월의 영령들이 희망한 권력은 정치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윤리까지를 아우르는 문화적 상상력임을. 이것은 새로운 상상력으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영역의 첫 구호에 불과하다.

류달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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