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 줄임말로 `자봉`이 널리 회자된다. 자원봉사는 `개인 또는 단체가 지역사회·국가 및 인류사회를 위하여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제공하는 행위`를 말한다. `대가 없이` `자발적`, 이거 되게 힘든 일이다. 어쩌면 `자봉`은 단순한 줄임말이 아니라, `대가 없`다지만 실상은 있고, `자발적`이라지만 본질적으로는 강제적인 봉사행위들을 뜻하는 신조어일지도 모른다.

사실 `대가 없는` 것도 문제다.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의 최고 덕목은 일한 만큼 받는 것이다. 모든 부당한 노동문제는 노동한 만큼 대가를 주지 않았거나 얻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일한 만큼 대가가 주어져야 마땅한 사회에서 대가를 받지 않는 노동의 범람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경제가 어렵다고 난리다. 일자리가 느는 게 아니라 줄어 든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작금에 `자봉`으로 충당되는 일들에,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주면, 더는 자원봉사일 수는 없겠지만, 일자리는 늘어나고 소비경제는 개선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학생의 자봉은 확실하고 분명한 대가를 받는다. 봉사시간 혹은 봉사점수. 게다가 학생들의 `자봉`은 자발성을 매우 의심 받는다. 대학입학과 각종 공무원·취직시험에 자봉을 필수조건으로 만든 자들의 취지가 무색해진 지 오래다. 자봉은 그저 더욱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공무원이나 대기업 회사원이 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갖춰야 할 스펙일 뿐이다.

마침내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만 13-18세의 청소년은 학생이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회`를 이룩했다.(물론 여전히,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공부 대신 노동을 하는 청소년도 상당하다.)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학생을 누가 `자봉`이란 이름으로 무료노동의 세계로 내몰았는가? 그들이 `자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숭고한 가치, 정말 그런 것을 학생이 얻는다고 보는가? 설령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왜 그 걸 학교에서 배워야지, 무료노동판에서 얻으라는 건가? 공부는 학원 가서 하듯이 인격도야는 사회 가서 하라는 건가? 도대체 학교는 왜 있는 건가?

자봉에도 소위 등급이 있는 모양이다. 알짜(지속성이 있고 시험관에게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자봉은 경쟁이 치열하기도 하지만 결국 스펙 넘치는 부모를 가진 학생에게 주어진다. 시험관이 별로 쳐주지 않지만 시간은 채울 수 있는, 배경 없는 평범한 중·고등학생이-학생 본인이 아니라 부모님이-그나마 쉬이 구할 수 있는 `시간` 자봉은 대개 행사보조다. 국가보조금을 받는 무수한 단체들이 각종 행사를 꾸준히 벌이기 때문이다. 대개 선착순이기 때문에 행사정보를 빨리 얻고 빨리 신청하면 된다. 국민혈세 받아서 그 행사 치르는 단체가 미래를 이끌어나갈 국민(청소년)을 무보수로 부려먹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다른 자봉은 몰라도, 중·고등학생의 자봉만은 제고가 필요하다. 학생이 자봉을 통해 함양할 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부정적인 면이 크다. 학생(부모)의 등급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해 치열한 경쟁과 학생 간의 위화감을 조장할 뿐이다. 자봉 때문에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다. 청소년은 왜 꼭 편의점, 피시방, 주유소, 식당 같은 데서만 일해야 한단 말인가? 일을 해야만 학교에 다닐 수 있고 생활이 가능한 청소년에게 현재 자봉으로 충당되는 일자리를 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학생은 공부(자아계발과 품성과 인격을 넓히기 위한 활동 포함)하고 독서해야 하는 이들이다. 공부 안 하는 시간은 놀아야 한다. 학생이 노는 게 그토록 불안하고 두려운가? 우리가 학생이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자원봉사가 아닌 자봉이 진정 사라지려면, 대입시 필수조건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자봉 때문에 얻는 게 있는 자들은 자봉시스템을 유지하려고 애쓸 테니 쉽지 않을 테다. 조금씩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어른들끼리 대가를 주고받으며 일하자. 학생인력이 꼭 필요하다면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주자.

김종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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