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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산책] 남겨야 하는 것

2019-09-10기사 편집 2019-09-10 08: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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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손미 시인
매일 한 시간 운전해 출근한다. 나의 출근길에는 상습 정체구간이 있다. 그곳에 정차해서 음악을 바꾸고, 물을 마시거나 아침으로 빵을 먹는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사방을 둘러본다. 상습 정체 구간 중 한 곳은 중동이다. 신나게 하상도로를 달리면서 만난 자전거 탄 사람, 울창한 버드나무를 벗어나면 마법처럼 나타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정 산부인과다.

나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아침에는 셔터가 내려와 있어 지금도 영업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밖으로 싱싱한 꽃이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꾸준히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병원 앞에 정차하면 나는 시간여행자처럼 기억의 어둑한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젊은 엄마는 복통을 시작한다. 너무 아파서 욕을 하는 엄마에게 그러면 욕쟁이 애기 나와요. 무정하게 간호사가 말한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서럽고 또 서러웠다던 엄마의 증언. 그날은 하얗게 눈이 내린 날이었고, 그해 가장 추운 날이라고도 했다. 그 밤, 나는 응애응애 세상으로 나왔다. 하나의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울면서 왔다. 그렇게 태어나 어린 시절은 석교동에서 보냈다. 날마다 뛰어놀던 골목의 담벼락,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에서 세 번은 골목 끝을 꺾어야 도착했던 우리 집. 자전거를 타고 뱅뱅 돌던, 둥구나무. 지금도 모든 게 그대로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어린 내가 묻어 있는 공간을 사실대로 목격할 수 있고, 그 시절의 나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다.

대전시립박물관에서 편찬한 '시대의 표정'을 보았다. 1950년대-1970년대의 대전 모습을 모아놓은 사진집인데 책을 펴자마자 익숙하고도 낯선 내 고향의 풍경에 넋을 놓았다. 차보다는 사람이 더 많은 목척교. 목척교에서 보문산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낮은 건물들. 2층짜리 중앙백화점, 3층 건물의 왕생백화점 등 이름도 생소한 백화점들과 풍랑극장, 중앙극장 등과 같은 간판을 보면서 그곳에 있었을,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대로 남아 있는, 살아남은 공간은 우리가 거기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있었다는 그 명료한 존재감. 그래서 오래된 마을과 건물, 담벼락은 오랫동안 거기 있었던 사연들을 대변한다. 그건 누구도 지어낼 수 없는 생생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오래되고 낡은 것일수록 가치 있고 비싸다.

대사동별당이 헐리고, 박용래 시인의 생가도 헐렸다. 대흥동 뾰족집도 본 모습은 아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아버지의 아버지가 만졌던 손잡이, 무수한 사람들이 열고 들어갔던 문, 온갖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창문까지. 남겨진 것은 우리보다 오래 산다.

백년 뒤에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여기에 존재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당신을 증명할 것인가?

손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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