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⑮ 서산 상홍리 공소

상홍리 공소 내부
사진=서산시 제공
상홍리 공소 내부 사진=서산시 제공
공소는 천주교에서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다. 본당은 신부가 상주하면서 미사의 집전이 이뤄지지만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를 대신해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공소예절이 행해진다.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에 따라 성사(聖事)가 집행된다. 상홍리 공소는 한 때 본당 역할을 할 만큼 형식이나 기능에 있어서 일반 공소와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937년 동문동성당으로 본당이 이전하기 서산지역 최초 본당 역할을 한 역사적 상징성을 지녔다. 한·양 절충식 건물인 상홍리 공소는 2007년 7월 3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38호로 지정 됐다.

◇상홍리 공소의 설립=상홍리는 현재 서산시 음암면에 속해 있다. 이곳은 1914년 일본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산군 두티면의 상노치리, 홍천리, 하노치리와 서산군 동암면 검동 일부 지역이 합쳐져 상홍리가 됐다. 상홍리 공소는 1882년 백흥진(1862년 입교) 초대회장이 상홍리로 이주, 사가(私家)에 공소를 설치한 것이 시초다. 문화재청 기록에 따르면 상홍리 공소는 1885년 81명, 1886년 102명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1887년 신자가 52명으로 줄어드는 데, 이는 당시 전염병이 창궐한 것이 신자 감소의 원인으로 추정된다. 1886년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유행해 수많은 이가 숨진 것과 무관치 않다. 교세가 다시 회복된 건 1910-1920년대로 110-120명의 신자를 유지했다.

◇서산지역 최초 본당=현재의 상홍리 공소는 1919년 폴리 신부가 수원백씨 문중인 백민수 씨의 땅 900여평을 기증 받아 강당과 사제관 등을 새로 지었다. 범 베드로 신부가 1937년 현재의 동문동성당을 신축, 본당을 옮기기까지 상홍리 공소는 본당 역할을 했다. 그만큼 형식이나 기능에 있어서 일반 공소와는 특별함이 있다. 1923년 44명으로 `서산천주교 청년회`가 결성된다. 이들은 본당 내에서 강습소와 야학을 시작하고, 오늘날의 주일학교나 신앙학교에 해당되는 문답학교를 운영했다. 여기에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에는 아이들을 맡아주는 농번기 탁아소도 운영되는 등 교육·복지활동에 힘을 썼다. 14대와 16대 공소회장을 역임한 백남석(89) 씨는 "상홍리 공소가 서산 본당이었을 때는 당시 서산지역 곳곳에 20여개 공소가 있을 만큼 서산천주교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며 "현재도 첫·셋째 주는 본당인 동문동성당에서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둘·넷째 주는 공소회장이 공소예절을 하는데 신자 100여명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서양 건축 양식의 조화=상홍리 공소는 전통 한옥에 서양의 바실리카 종교건축 양식을 구현한 한·양 절충식 건물이다. 한옥과 유럽의 성당 건축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독특한 형태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등록 됐다. 종탑과 본당, 배면부의 제의실로 구성돼 있다. 본당은 바실리카 양식과 전통 한옥 양식이 복합돼 있으며, 성당 양쪽 외부는 회랑으로 이뤄졌다. 본당 전면의 종탑은 1986년 원형 복원 됐다. 기와 3칸의 형태로 솟을대문 형식을 활용했으며, 성당 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본당 전면에 한옥형 종탑을 배치한 것도 이채롭다. 현 제단부는 옛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천주교의 전통적인 전례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배면부의 제의실은 두 차례에 걸쳐 증축된 것으로 확인된다. 신부가 상주하던 사제관이 부속 돼 있다. 상홍리 공소는 전체적으로 서양의 바실리카 종교건축 양식을 기반으로 기와지붕의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등 한옥 구법을 반영하고, 동시에 공간구성의 배치는 서양 천주교 성당의 배치 원칙을 따른 것이 눈여겨볼 포인트다.

◇역사적 의의=상홍리 공소는 1920-1937년까지 서산본당으로 서산지역 천주교 전파의 초석이자 중심지였다. 천주교 역사의 상징적 건축물로서의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성당으로 사용된 공소 건물은 내부구성과 성당 측면부의 회랑처리, 한옥구법을 이용한 종탑 등을 통해 서양식 건축과 한옥이 조화미를 이뤘다는 점에서 근대건축사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1935년 당시 주임신부인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해미지역 순교자의 유해발굴 및 보존이 이뤄지면서 천주교 순교자 현양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당시 병인박해 당시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해미면 조산리(현 해미순교성지) 하천변에 생매장돼 있던 순교자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3곳에서 진행된 발굴 결과 묵주고상과 유골 등이 발견 됐는데, 신자들은 상홍리 공소 뒷산에 유해를 모셨다. 이 유해는 새롭게 준공된 해미성당으로 옮겨진다. 현재는 유해 일부와 `병인년해미순교자묘`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정관희·박계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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