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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칼럼] 나이팅게일을 꿈꾸는 간호사들이여

2020-01-14기사 편집 2020-01-14 13: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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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권로사 대전을지대학교병원 간호사
병원 외래의 하루는 아침부터 바쁘게 시작된다. 나는 하루 300여 명을 마주하는 관절척추센터 외래 간호사이다. 덕분에 아침시간 여유 있게 멋을 내어보는 사치는 오래전에 접어두었고, 일상에 익숙해진 몸은 알아서 척척 속도를 내며 일을 처리한다.

'여유 있게'라고 마음 한 구석에서 소리치지만, 내면에서 들리는 '서두름'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그 땐 이미 여유는 패자가 되어있다. 그리고 밀려드는 환자들에, '나의 속도감만이 오늘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속아 한결 더 속도를 내곤 한다.

병원 외래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진료 접수 후 외래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은 평범한 사람에서 '환자'라는 호칭으로 호명된다.

밤새 끙끙 앓고 아파서 온 환자인지, 보험 서류가 필요해서 왔는지, 수술상담을 위해 여러 곳을 돌고 돌아왔는지……. 환자와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그들의 특징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나를 보고 갓 입사한 새내기 동료가 신기한, 혹은 의심어린 눈빛을 날리는 건 아마도 섬뜩하리만큼 잘 알아내는, 어쩌면 '자리라도 깔아야 하는' 묘한 알아차림 때문일 것이다.

최근 기억에 남는 환자 사례가 있어 소개 하려 한다.

비도 오고 찬바람도 불어, 그야말로 을씨년스런 오후 시간에 60대 후반의 남성 환자가 홀로 외래로 들어섰다. 다리를 저는 것으로 보아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고, 진료 결과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야 했다.

환자의 수술 전 준비를 돕고 입원장을 건네던 시점, 환자가 '가족이 없이도 수술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왠지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빛나는 두 눈빛으로 말이다.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해 병원 사회사업팀에 연결해주었고, 수술과 수술 후 문제까지 상담을 나눈 후 마무리 지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환자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환자의 낡은 가방은 금방이라도 끈이 떨어질 듯 매달려 있었고, 겨우 열리는 지퍼도 뾰족한 클립 한 쪽을 당겨 열어야 했다. 환자는 그 속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혀있긴 했지만 비닐에 잘 싸여 있는 서류 보따리를 꺼냈다.

바쁜 나를 붙들어 세우고 보여준 건 환자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는 등본이었다. 그 속에는 주소지와 환자의 아내, 그리고 자식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환자는 아마 병원에 혼자 와 서럽고 힘들었던 본인이 수술할 수 있게 도와준 감사의 표시로, 그가 가장 아끼는 가족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할 수 없었던 사연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환자는 수술을 잘 마쳤고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에 오면 나를 찾곤 한다.

아마도 환자는 언젠가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낡은 등본 속 구성원에 대해 말해줄 것만 같다. 혼자라는 외로움 속에서, 수술과 함께 알게 된 어느 낯선 간호사에게 '말동무'라는 온기가 느껴졌나 보다. 나라는 사람이 그동안 잊고 지내던, 아니면 가슴 속 너무 깊이 묻어 두어 꺼내기조차 어려웠던 소중한 보물 같은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했을까?

내가 환자의 외로움에 힘이 된다면, 다음번에 쏟아 놓을 그의 가족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으로 환자가 살아가는 의미에 희망의 불씨를 퍼 나르는 '나이팅게일'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거창하고 크지 않아도 세상을 뒤흔들만한 일은 아니어도 여릿하게 피어오른 불꽃만으로도 따뜻함을 전할 수 있다면, 매일 바쁜 일상에서 만들어내는 나의 실수를 묻어가면서라도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나이팅게일이 되고 싶다. 그리고 환자들이 먼저 우리에게 '천사'라고 불러줄 수 있도록, 우러나오는 실천을 곱씹어본다.

2020년 새해는 WHO가 지정한 '세계 간호사의 해'이다. 미래의 나이팅게일을 꿈꾸는 그대들이여! 거친 바람이 등 뒤로 불기만을 바라기 보다는 앞에 나와 당당히 맞서 만든 길이 더 탄탄하리라 믿고, 다이내믹한 현장에 두려운 마음보다 즐거운 환호로 달려들길 바란다. 그리하면 꽃길은 이미 그대들의 것임을.

권로사 대전을지대학교병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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