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鐵原)에 가면 궁예에 대한 많은 흔적들을 느낄 수 있다. 철원은 우리에게 남과 북의 접경지역이라는 이미지로 먼저 다가온다. 군 주둔지, 비무장지대(DMZ) 등이 떠오른다. 궁예는 처음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했다가 얼마 후(905년) 철원으로 옮겨왔고, 그 후 나라이름도 `태봉(泰封)`으로 바꿨다. 그가 후삼국의 분열을 통합하려는 뚜렷한 철학이나 역사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버림받았다는 개인적 복수심이 더 강했는지도 모른다. 918년 왕건 세력에게 쫓겨날 때까지 철원은 십 수 년 동안 그의 근거지였다.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고,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며 국토를 통합하려했던 궁예의 꿈이 서린 곳이다. 야트막한 철원 소이산(362m)에 오르면 광활한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교과서에서 들었던 중부지방의 곡창지대 철원 평야다. 궁예가 왜 이곳을 근거지로 정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6·25 전쟁 직전까지 이곳 소이산 주변은 교통의 요지이며, 수 만 호의 민가가 있었던 철원의 중심 번화가였다고 한다. 멀리 폐허가 된 노동당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사람은 물론 산천마저도.
저 멀리 북쪽으로 아득하니 수풀이 더 무성하게 우거진 곳이 보인다. DMZ다. 그 한가운데 궁예의 흔적이 남아있다. `태봉국 철원성`, 이른바 `궁예도성(弓裔都城)`이다. 장방형의 도성은 외성과 그 안쪽 내성, 그리고 궁성으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외성의 둘레는 약 12.5㎞라고 하니 고대 도성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약 2㎞씩, 총 4㎞ 정도의 폭으로 설정돼 있다. 그런데 도성은 남북 길이가 약 4㎞라고 하니 비무장지대의 폭과 거의 일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공평하게) 거의 절반씩 나뉘어져 있다. 지난 70년 동안 누구도 그 정확한 모습을 확인한 적이 없다. 역사 기록에서도 도성이 꽤나 화려했다는 기록이 있고, 분단 이전에 찍은 사진이나 기록, 항공사진 등을 통해 어렴풋한 상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도성에 대한 조사는 오래전부터 남북관계가 호전 기미를 보일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는 대상이다. 남과 북에 절반씩 걸쳐 있고, 그것도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에 오롯이 위치하고 있으니 조사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지뢰제거, 남과 북의 긴장완화에 대한 확고한 입장뿐 아니라, 국제적 이해의 토대가 마련돼야 하는 복잡한 방정식이다. 오늘도 멀리서 수풀 우거진 그 안에 감추어진 옛 자취를 어렴풋이 바라볼 뿐이다. 개성 만월대에서 남과 북의 연구자들이 함께 조사했던 그 모습이 언제 철원에서 재현될 것인지. 통일을 바라며, 그 시금석이 될 태봉국 철원성(궁예도성)의 온전한 모습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날, 궁예를 위하여 한 잔 술이라도 올릴 수 있기를. 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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