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무 한남대 교육학과 교수
이상무 한남대 교육학과 교수
필자의 유년시절인 1980년대에는 아파트라고 해도 지금과 비교하면 이웃 간의 소통이 원활했었다. 그래서 필자가 집 밖에서 사고 비슷한 것을 치고 집에 들어가면 필자의 어머니는 귀신같이 이미 알고 계셨다. 아마도 필자를 알고 있는 이웃의 어르신들이 필자가 한 짓을 어머니께 바로 전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변의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마을에서 놀 때는 항상 몸가짐이나 말투를 바르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물론 생각만큼 잘 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살던 동네의 어르신들도 나를 성장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셨다.

이는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을이 교육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율곡 이이가 성균관의 규칙인 학령(學令)을 보완하기 위해 쓴 학교모범(學校模範)에는 모두 16가지의 주제가 수록돼 있는데, 이 중 접인(接人)이라는 주제에서는 한 사람이 교육적으로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웃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덕업상권(德業相勸), 예속상성(禮俗相成), 과실상규(過失相規), 환난상휼(患難相恤)과 같은 향약의 내용이 그대로 포함돼 있다. 향약의 덕목이 국가의 교육문건에서 확인된다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을이 교육적으로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덕목을 제대로 실천하면 좋은 일을 한 사람의 명단을 적은 책인 선적(善籍)에 이름을 올리고,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나쁜 일을 한 사람의 명단을 적은 책인 악적(惡籍)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악적에 이름을 올리면 과거시험 응시 자격이 박탈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조선후기 호서산림 오현(五賢) 중에 하나로 불리는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가 작성한 향약에서도 이러한 덕목들의 준수 여부에 따라 선적과 악적에 이름을 올리도록 돼 있었다. 당시 선적과 악적의 관리는 향교뿐만 아니라 향약에서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마을은 나름의 교육적 역할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들어 아이들을 키우는 학부모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다양성의 욕구가 증가하면서 지역 사회와 학교에 교육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을 정리하고 뒷받침하는 다양한 연구들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아쉬운 점은 마을교육공동체와 관련된 논의들이 주로 외국의 사례들만을 참고해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우리의 교육 전통에도 마을의 교육적 역할에 대한 논의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논의에서 이를 거론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향약의 모습을 그대로 마을교육공동체에 적용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마을교육공동체를 우리가 수용 가능한 형태로 잘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교육 전통에서 마을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우리와 삶의 맥락이 다른 외국의 사례들은 참고하면서, 우리의 교육 전통을 참고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교육 전통을 살펴보고 우리나라 특성에 맞는 마을의 교육적 역할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저 관련된 사실들만 잘 모으고 정리만 해도, 현재의 마을교육공동체와 관련된 논의를 더욱 더 풍부하게 해줄 것이다. 이상무 한남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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