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전배 (재)천안문화재단 천안예술의전당 관장
임전배 (재)천안문화재단 천안예술의전당 관장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만들어내기는 어렵다(중략) 직접 보고 직접 들어야만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예술은 다른 어떤 일보다 매번 새로운 흥분이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미안 수업(지와인刊)>의 著者 윤광준은 예술이 즐거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모든 영감(靈感)의 원천이자 창조적 행위인 예술을 읽어내는 일은 쉽지는 않으나 인류가 누리는 최상의 유희는 단연코 예술 그 자체다. 그로인해 세상 속에 미술관이 존재해야할 이유가 확증되고 사람들이 전시공간을 찾아가면 어떤 연유로 행복해지는지 깨닫게 된다.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역사와 예술성으로 도시 전체가 하나의 웅대한 뮤지엄이나 다름없다. 특히 금(金)세공사(細工師)의 아들로 태어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작품<연인>은 절대적이다. 그 원작을 만나기 위해 벨베데레궁전의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면 미술관에서 클림트의 압도적 걸작 를 영접할 수 있다. 샤워하듯 온몸을 흘러내리는 황홀한 황금빛 감흥. 불안정하고 치명적 구도. 캔버스 가득 번지는 거부할 수 없는 처연한 고뇌. 그 작품이 그곳에 있기에 비엔나를 찾게 되는 이유가 넉넉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처럼 작품 감상은 현장에서 직접 실물 대면해야 깊은 감흥이 오래토록 유지된다. 어떤 작품의 경우는 솟구쳐 오르는 마그마 분출처럼 격정적일 때도 있다. 실제로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 서울전시에서 작품<레드>를 감상하다 혼절한 관람객이 몇몇 있었다 한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작품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렬함에 관람객의 몸이 적극 반응하는 놀라운 현상(스탕달신드롬 Stendhal syndrome)이 실재한다. 이같이 작품과 관람자가 동화(同化)되는 동질감 속 짜릿한 전율도 예술품감상의 일부다. 그러나 대부분 미적교감은 한참 후에 조심스레 발견되는 달팽이 이동흔적처럼 서두름 없이 찾아온다. 화선지에 스며드는 묵(墨)의 농담(濃淡)처럼 은밀히 스며들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자극적이지 않은 감흥이 더욱 오래토록 유지될 수도 있겠다.

예술의 본연(本然)을 제대로 만나려면 우선 여러 작품과 빈번한 접촉이 이뤄져야함은 당연하다. 그러다 관람객이 작가의 심연을 헤아리게 되고 작품이 품은 기운까지 전달되면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둔중한 교감이 이뤄진다.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체험한 만큼 읽을 수 있음은 진리 아닌가. 한때 등산복차림 순례(巡禮)떼를 형성했던 해외미술관투어, 단지 유명작품 앞에서 손가락포즈 브이만 기록하고 돌아오는 스탬프찍기형 유람(遊覽)시대는 지났다. 갤러리 한 곳을 가더라도 여유를 갖고 깊이 생각하며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습관을 들이면 어떨까. 작가의 숨결이 눈으로 들어왔으나 머릿속에만 머물고 가슴으로 감흥(感興)이 내려오지 않는다면 일단 그 공간은 지나치자. 다른 작품을 관람한 후 돌아와 다시보고 무언가 느낄 수 있다면 한나절을 소비하더라도 결코 무익하지 않으리라.

예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내게로 오는지 즐거운 이유를 알면 사람 들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설렌다. 나아가 주도적으로 예술작품을 찾아가 보고 듣고 누릴 줄도 알면 이생의 삶이 새롭게 감사하고 고맙게 느껴져 온다. 세상에 간절히 기대하는 절실함 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행운은 흔치 않다. 고귀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부지런해야한다. 생활주변 갤러리나 지역작가의 공방 또는 수도권 유명미술관 등에서 열리는 다양한 미술전시에 많은 발품을 팔아 행복을 가슴 가득 풍성하게 들이시길 응원한다. 임전배 (재)천안문화재단 천안예술의전당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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