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순 지구촌사랑교회 담임목사·시인
박대순 지구촌사랑교회 담임목사·시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51년 스위스 제노바의 직공으로 일하던 스페인 출신 아버지 도메니코 콜롬보와 스페인계 유대인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4차례에 걸쳐 항해하던 15세기 후반은 한마디로 종교의 영역까지 빠르게 변하던 시기다. 이 시기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영국 청교도들은 당시 완전한 종교개혁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던 네덜란드로 떠나 한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도 완전한 개혁적 신앙생활을 하는 데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됐다. 더 이상 그 곳에 기대 살 수 없다고 생각해 스피드웰호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네덜란드를 떠난 청교도의 배가 항해 도중 고장났다. 고장난 배로는 항해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배로 바꿔 탔다. 그 배가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메이플라워호`다. 이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거친 파도와 바람을 넘어 앞으로 나갔다.

마침내 새롭게 정착해 살아갈 땅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그들은 북 버지니아 땅에 정착하고 삶의 터전을 만들려 계획했다. 하지만, 이미 영국의 왕권이 영향을 미치고 있어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들은 허드슨 강 유역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인디언과 탐험대 간 대치 상황으로 인해 배를 정박할 수 없었다. 선장은 좀 더 더 북쪽으로 올라가 플리머스라는 장소에 배를 정박했다. 이 곳에 도착한 청교도 102명 중 반수 이상이 풍토병과 영양결핍으로 죽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인디언들에게 옥수수 씨를 얻어 심고 경작해 석 달 치 양식을 수확한 후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청교도들은 왜 이 척박한 땅으로 가서 살았을까? 플리머스에 도착한 후 왜 가장 먼저 예배당과 학교를 세우고 집을 지었을까? 그 당시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탐험대를 조직해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 그래서 분노한 인디언과 탐험대가 가장 극심하게 전쟁한 장소가 바로 뉴저지 지역이었다. 그런가 하면 북쪽의 플리머스와 뉴 잉글랜드 지방은 패스트가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인디언들도 백인들과의 전쟁과 패스트라는 전염병으로 인한 심적인 고통으로 힘든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인디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구상 시인은 `실존적 확신을 위하여`에서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을 인용해 삶의 보람을 찾게 하는 신비한 원동력이 실존적 확신으로 나아가는 원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근원적 초청에 전적으로 응답하는 길이 영원 속에서 오늘을 찾고, 오늘 속에서 영원을 찾는 태도라 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라 했다. 이러한 실존적인 삶이 청교도와 인디언들이 바라는 꿈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넘치는 이야기일까. 이웃과 공존해 나가는 영원의 과정에서 오늘을 찾고, 오늘 속에서 미래를 찾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자세에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던 어느 날 두 인디언이 청교도들이 있는 마을에 와서 "이 땅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했다. 이 중 `스칸토`가 뉴 잉글랜드 지방과 주변 지역을 총괄하는 가장 큰 추장과 평화조약을 맺도록 도왔다. 이 조약으로 청교도들은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인디언들도 자유를 지키게 됐다. 지금도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부족한 부분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서로의 영역을 놓고 다투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에 청교도과 인디언의 공존법을 사용해보면 어떨까. 특히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불편함을 유발하는 공간 속에 이들의 공존법이 녹아들게 하면 안 되는 것일까. 박대순 지구촌사랑교회 담임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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