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⑪충주시

신니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사진=충주시 제공
신니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사진=충주시 제공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암살`의 주인공인 류자명 선생의 고향이 충주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충주시민들 또한 류자명 선생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다행히 류자명 선생과 함께 대표적인 충주지역 독립운동가인 권태응 선생에 대한 업적 평가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충주지역은 조용하고 작지만 알차게 독립운동을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권태응 선생 외에는 다소 부실한 것이 현실이다. 신니면 만세운동도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들의 신념은 그 당시 누구 못지않게 강직했다. 독립운동역사를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연구하고 재조명을 받아야 된다는 여론이 충주지역에서 일고 있다. 역사는 미래의 교과서라는 말이 있듯이 충주 독립운동역사가 이제라도 바로 서야 한다.

◇충주 독립운동의 신호탄 `신니면민 만세운동`

충주의 독립운동 역사는 1919년 3월 11일이 시초다. 이날 달천리(달천동)에서 천도교인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다 일제 헌병에게 저지당하고 해산됐다. 하지만 여기에 멈추지 않고 다음날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당시 충주읍에 집결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들불처럼 번진 3월 11일 충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당시 내부적으로 학계와 종교계, 학생 등의 준비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선 10일에 범바위(호암동)에서 충주간이농업학교 졸업기념 야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15일인 충주 장날에 맞춰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를 이어나갔다. 여기에 충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기독교 측과 협의를 통해 계획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헌병 보조원에 채용되기로 일제와 결탁한 `내부자`가 나오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여기에 지역의 기독교 인사들은 비밀리에 교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알리는 유인물 수백여장을 만들어 사전 준비를 했으나 이마저도 거사전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11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충주지역의 학생과 지식인, 종교인들은 점조직으로 밑바닥에서 준비를 이어 나갔고 만세운동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런 의인들이 있었기에 자랑스러운 충주 독립운동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

충주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4월 1일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있었던 독립 선언서 낭독이었다.

이날 장날을 기해 모인 200여 명의 시민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일본 헌병에게 막혔고 손승억, 단경옥 등 8명의 독립투사들이 현장에서 채포돼 옥고를 치뤘다. 신니면 만세운동이 충주지역의 본격적인 독립운동 신호탄이 된 것이다.

충주시는 1919년 4월 1일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해 일어난 `신니면민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2003년 12월 만세운동 유적비를 용원초등학교 앞에 건립하고 2006년부터는 매년 선열들의 고귀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며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충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충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는 혁명가를 꿈꾸던 류자명 선생과 권태응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류자명은 1894년 충주시 대소원면 영평리에서 류종근과 이기도의 2남 1년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흥갑이고 학교 다닐 때는 흥식이라 불렀다. 류자명은 서당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문을 배우고 충주 읍내로 나가 보통학교를 다녔다. 수원 농림학교를 졸업 후 1916년부터 충주 간이 농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3.1운동을 맞게 됐다. 충주 만세 시위를 기획하던 비밀활동이 일제 헌병에 발각돼 상해로 망명한 유자명은 의열단에 가입하고 본격적인 무장독립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 당시 신채호와 더불어 아나키스트 노선에서 활동했다. 독립운동에 끊임없이 가담해 조선 의용대 지도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대만을 거쳐 입국하려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에서 원예 학자로 활동하다 생을 마감한다.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북한에서도 1978년 3급 국기훈장을 수여해 남북 양 체제에서 동시에 인정받는 독립운동가가 됐다. 유해는 2002년 대전현충원에 봉환됐다. 현재 충주지역에서는 선생의 업적과 삶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고 있다.

류자명 선생과 함께 아동문학가인 권태응 선생도 충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다. 권태응은 어려서 문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음악과 운동도 좋아했다.

1932년에 충주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권태응은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문학과에 유학했으나 평소 일본인들의 부당한 행위에 불만을 갖고 항일운동에 나서게 됐다.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한 후에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 독서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1939년 항일운동 혐의로 스가모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폐결핵으로 판정받아 1940년 6월 출소했다.

귀국하여 치료를 받던 중 병세가 악화되자, 고향인 충주로 내려와 농업에 종사했다. 이러면서 야학과 소인극(素人劇)을 통해 민족운동에 열중했으며, 아동들에 깊은 애정을 갖고 동요 창작활동에도 매진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 약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병세가 악화되어 1951년 3월에 별세했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애국과 항일의식 담겨있는 시 `감자꽃`이 있는데,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항하려는 의도를 갖고 지은 작품이다. 2005년 항일운동의 공훈이 인정돼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 독립운동가 권태응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행사 `다양`

충주에서는 권태응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먼저 권태응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을 만들었다.

선생이 경성고보 시절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시기부터 동시에 전념하다가 유명을 달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의 활동상을 극으로 표현한다.

연극대본은 충주시에서 운영하는 극단 달래(대표 이억신) 출신의 극작가가 쓰고 재능기부로 선생의 삶을 엮어냈다.

지역출신의 배우, 무용가, 합창단 등이 연극에 출연해 선생의 애국정신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냈다.

또 충주시와 권태응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권태응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감자꽃 큰잔치`도 열었다. 여기서는 권태응 학술대회, 권태응 음악 공연, 제1회 권태응 문학상 시상식 및 축하 공연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됐다.

권태응 선생 관련 자료 전시도 충주문화회관에서 2주간 열렸다. 이에 함께 권태응 선생을 기리는 제2회 전국 동시인 대회에는 `6인 6색 동시 콜라보`, 동시 낭독, 어린이 독자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 지역 동시 모임 낭독 공연, 권태응+류선열 문학기행, 동심 나누기 운동회, 시인과 독자가 함께하는 백일장 등 1박2일 동안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진광호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권태응 선생의 시집 `감자꽃`. 사진=충주시 제공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권태응 선생의 시집 `감자꽃`. 사진=충주시 제공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권태응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충주지역에서는 활발하게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은 권태응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포스터. 사진=충주시 제공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권태응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충주지역에서는 활발하게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은 권태응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포스터. 사진=충주시 제공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권태응 선생 학생시절 사진. 사진=충주시 제공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인 권태응 선생 학생시절 사진. 사진=충주시 제공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인 `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 사진. 사진=충주시 제공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인 `아나키스트` 류자명 선생 사진. 사진=충주시 제공
충주 독립운동의 시초가 된 `신니면 만세운동` 재현 행사. 사진=충주시 제공
충주 독립운동의 시초가 된 `신니면 만세운동` 재현 행사. 사진=충주시 제공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