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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포럼] 연구실 불은 꺼져야 한다

2019-08-13기사 편집 2019-08-12 18:4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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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연구실에서 젊음을 불사르던 20대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하루 12시간 근무는 당연했고, 일이 많은 날은 기숙사에서 8시간만이라도 쉬다 나올 수 있다면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심한 때에는 일주일 동안 하루 4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연구실에서 살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주말에도 당연히 출근해서 근무를 했다.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았고, 나름 연구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고동락하던 연구실 동료들과 주말에 같이 놀러라도 가면 너무 즐거웠다. 그 시절에는 동료들이 정말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당연히 여겨지던 12시간 근무를 하고 있을 때, 큰 변화가 찾아왔다.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연애를 시작하자 갑자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매일 야근을 했었는데, 야근을 하지 않고 일찍 퇴근해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매주 주말마다 출근을 해서 일을 했던 이전과 달리 주중에 일을 다 마치고 주말에는 연인을 만나러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근무시간은 줄었는데 하는 일의 양은 변화가 없었다. 훨씬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인과는 헤어졌지만, 이 경험은 큰 깨달음을 주었다. 같은 시간을 근무해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 사실은 일을 위해서 연구실에 머무르던 것이 아니라, 동고동락하던 동료들과의 시간이 즐거워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지금도 동고동락하던 동료들과 가족처럼 지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향수가 있지만,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요즘은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시대다. 가족같이 지내던 동료들과는 더 이상 그런 유대감을 갖기 어려워졌지만, 진짜 가족과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요즘 주 52시간 제한에 반대하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아베 일본수상의 만행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고 하면서 주 52시간 제한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절대적으로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52시간보다 더 일하면 삶의 질이 낮아지고, 이는 전체적인 연구 성과에 악영향을 끼친다.

한민족은 기본적으로 농경민족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 질 녘까지 열심히 일하면 그만큼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근면성실이 우리 민족에게 아주 소중한 가치였다. 현재도 그 가치를 매우 소중하다. 하지만 농사일에도 근면성실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때를 기다려서 진행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씨를 뿌릴 수 없고, 씨를 뿌리자마자 추수할 수는 없다. 농번기가 있으면 농한기가 있기 마련이다. 농사에서도 쉼이 필요하다.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연구에서는 쉼이 더욱 중요하다.

이전 시대에 하루 12시간씩 근무하면서 성과를 내던 사람들에게 쉼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경험이 가장 큰 편견을 만든다. 정말 근면성실하게 일하여 성과를 냈었는데 이제 쉬면서 일하고 성과를 내자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주장들에 대해 기시감이 드는 것은 2003년 주 5일제 시행할 때도 이런 주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이 주 5일제를 하고 있었음에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처럼 주 5일제를 하면 나라 망한다는 보도가 넘쳐났다. 주 5일제가 정착돼 가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는 망했는가?

주 52시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 근로시간은 주 40시간이다. 선진국들은 주 36시간 근무를 하기도 한다. 아직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아니라서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선진국들은 이미 쉼을 허용해서 창의적인 연구결과를 유도하고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은 공포스럽긴 하지만 선진국들이 이미 가본 길이다. 우리도 할 수 있다. 갈 수 밖에 없는 길이다. 우리도 선진국처럼 연구실 불을 끄고 쉼을 허해야 한다.

최용석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정보전산실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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