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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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무너지는 꽃 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떨며
산호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 김기림, `연륜` -
(나)
제 손으로 만들지 않고
한꺼번에 싸게 사서
마구 쓰다가
망가지면 내다 버리는
플라스틱 물건처럼 느껴질 때
나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시퍼런 무쇠 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
- 김광규, `대장간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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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보기>를 참고하여 (가), (나)를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보 기>---------------------------
시인은 결핍을 느끼는 상황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삶을 성찰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연륜`은 축적된 인생 경험에서, ?대장간의 유혹?은 현대인이 추구하는 편리함에서 결핍을 발견한 화자를 통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재해석된다. 두 작품은 결핍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구심점으로 삼아 시상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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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가)에서 `서른 나문 해`를 `초라한 경력`으로 표현한 것은, 화자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변변치 않은 경험으로 재해석한 것이겠군.
② (가)에서 `불꽃`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주름 잡히는 연륜`에 결핍되어 있는 속성을 끊을 수 있는 수단이라는 의미로 재해석한 것이겠군.
③ (나)에서 지금은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고 표현한 것은, 일상에서 결핍된 가치를 찾고자 하는 화자의 열망을 공간에 투영한 것이겠군.
④ (나)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걸려 있고 싶다`고 표현한 것은, 화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표상하는 사물의 상태가 되고 싶다고 진술함으로써 결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겠군.
⑤ (가)에서 `육지`를 지나간 시간을 막아 둘 공간으로, (나)에서 `버스`를 벗어나고 싶은 공간으로 표현한 것은, `육지`와 `버스`를 화자가 결핍을 느끼는 공간으로 재해석한 것이겠군.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이다. (가)의 `주름 잡히는 연륜`은 <본문>의 `피려던 뜻`이 굳어 이루어진 것과 <보기>의 `축적된 인생 경험에서 결핍을 발견한 화자`로 볼 때, 높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활력을 잃고 나이만 먹는 화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불꽃`은 초라하고 덧없는 삶을 버리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한 열렬하고 열정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하며 `연륜`에는 `불꽃`과 같은 열렬함이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불꽃`이 `연륜`에 결핍돼 있는 속성을 끊을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채워 넣어야 하는 요소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오답들을 살펴 보면, ①번은 <보기>에서 (가)는 인생 경험에서 결핍을 발견한 화자를 통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재해석된다고 했다. 따라서, (가)의 `서른 나문 해`는 화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의미하는데, 화자가 이를 `초라한 경력`이라고 표현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초라하고 변변치 않다고 단호하게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③번은 <보기>에서 (나)는 현대인이 추구하는 편리함에서 결핍을 발견한 화자를 통해 일상의 경험이 재해석되고, 결핍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했다. 따라서, (나)에서는 도시 문명에서 화자 자신이 가치없게 느껴지는 순간, 지금은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참된 가치를 찾고자 하는 화자의 열망을 공간에 투영했다고 볼 수 있다.
④번은 <보기>에서 (나)는 결핍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구심점으로 삼아 시상이 전개된다고 했다. 따라서, (나)의 화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고 했는데, 화자가 되고 싶다고 한 사물들은 `무쇠 낫`이나 `꼬부랑 호미`이다. 이는 화자가 추구하는 참된 가치를 상징하는 소재이기 때문에 `걸려 있고 싶다`는 결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⑤번은 <보기>에서 (가)와 (나)의 화자가 결핍을 발견하고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재해석한다고 했다. (가)에서 새 삶을 살기 위해 `섬`으로 가려는 화자가 그전에 `육지`에 초라한 경력 즉, 지나간 변변치 않게 살아온 시간을 막아두겠다고 했다. (나)에서 자신이 `플라스틱 물건`과 같이 무가치하다고 여긴 화자는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고 하고 있다. 이처럼, (가)의 `육지`와 (나)의 `버스`는 화자가 결핍을 느끼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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