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창규 목원대 영어교육과 교수
성창규 목원대 영어교육과 교수
올해 무더위는 덜했고 늦장마가 온 듯했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비 내리는 풍경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곳에는 홀과 주방을 구분하는, 긴 바 테이블을 둔 나만의 좌석이 있다. 내가 테이블에서 게임도 하고 유튜브도 봐서 그런지 우리 학과 학생들은 그곳을 나의 놀이터로 보는 듯하다. 사실 겹치는 일로 잠깐 일탈을 꿈꾸며 멍해 있거나 글감 또는 논문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카페의 사장님과 바를 두고 하루하루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가끔 사장님의 개 "밍구"가 바를 넘어 쓰다듬어 달라고 아양을 떤다. 내가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면 테이블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처럼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똑똑한 친구다. 카페 곳곳엔 6년 이상 살아온 고양이 "라떼"의 집이 있다. 엄마였던 "바바"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이다. 라떼는 2-3살 때 자신의 몸을 스치며 수줍게 친근감을 표시했던 녀석인데, 요즘은 제법 삶의 경험이 쌓이고 갱년긴지 사람들의 관심에 시큰둥하다.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면 더 해달라는 눈치는 보이는데 전처럼 다가오는 경우가 드물다.

지난주에 논문을 쓰다가 답답한 마음에 여느 때처럼 카페에 들렀다.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의 시 「스컹크 시간」("Skunk Hour")과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의 시 「스컹크」("Skunk")의 비교에 관한 글을 쓰는 중이었다. 두 시인 사이에는 실제 교류도 있었고 히니가 특정 시집에 로웰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터뷰할 정도로 비교 분석할만한 내용은 충분했다. 오히려 정보가 많다 보니 추려내어 글로 정리하며 내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스컹크라면 대부분 악취의 대명사로 쉽게 다가가기 힘든 동물이지만, 두 시인 모두 자기 성찰의 중요한 계기로 삼는다. 로웰의 스컹크는 "새끼들을 일렬로 데려가는 어미 스컹크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신 크림 통에 쐐기 같은 머리를 쑤셔 박고, 타조 같은 꼬리를 늘어뜨리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타락하고 피폐한 세상과 삶의 의욕도 상실한 자신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는 존재로 본다. 히니는 타국의 갇힌 기분이 드는 외딴곳 정원에서 스컹크를 보고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반가운 스컹크 이미지와 아내와의 추억을 겹친다. 그는 "몰두하며 매력적이고 평범하고 신비한 스컹크"라 지적하는데, 아내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 형용사의 열거로 보인다. 마침 카페에 밍구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눈짓으로 인사하고 주인 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카페 입구 쪽 창가에서 라떼가 나와 같은 시선으로 바깥 빗줄기를 보고 듣는다. 두 잔째 커피를 마실 즈음 두 시인의 연결고리인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의 시 「아르마딜로」("Armadillo")를 천천히 읽어보니 글을 진행할 꼭지의 순서가 보였고, 불필요한 정보가 빗물에 씻기기 시작했다. 바 테이블을 넘지 않은 친구가 고마웠고 바 테이블 끝에 조용히 물만 마시다 사라진 친구도 고마웠다.

문학 비평에서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는 본문의 구절을 신중하고 면밀하게 해석하는 접근이다. 작가의 생애나 글을 쓸 당시 정치, 사회적 맥락을 차치하고 작품 자체만 집중해서 보는 신비평과 맞닿아 있으며 사실 수년 전까지 대부분 영문학 교육이 이 방법론에 기대는 편이었다. 용어상 반대급부로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는 컴퓨터와 디지털 라이브러리를 적용하는 문학 연구의 접근법이다. 21세기가 되면서 문화 분석, 양적 문학 연구, 거시 분석, 알고리즘으로 본 문학 비평이 비슷한 맥락이다. 이전까지 꼼꼼히 텍스트를 읽어서 전문가의 비평을 토대로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특정 주제나 빅데이터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도 논의 대상에 두고 비교 분석하면서 스타일이나 패턴을 이해하는 방식이며 "세계 문학"이라 칭하기도 한다. 두 읽기 방식 중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것은 아니고 서로 보완하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 작품을 어느 정도 꼼꼼히 읽었을 때 다른 새로운 작품이나 문화 현상에 시각이 조금씩 생겨난다. 또 다양한 매체를 통해 문학 작품을 표현해내는 방식에 익숙할 때 본래 출발점이 어디인지 찾고픈 의지와 확장성이 생긴다. 두 문학 작품의 읽기 방식의 구분을 분명하게 선 긋는 것보다 카페의 바 테이블 같은 이 경계에서 두 이해 방식을 시의적절하게 누리고 싶다. 성창규 목원대 영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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