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德) 품은 현자의 고장…수백 년 이어온 대전·충청의 ‘정신’

계족산에서 바라본 대덕구 및 대전시내 전경
계족산에서 바라본 대덕구 및 대전시내 전경
대전 시민들에게 대전의 중심지, 도심 하면 금세 중앙로 일대 또는 둔산 신도시를 떠올린다. 둔산 신도시는 1990년대부터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밀집된 신도시로 개발되고 대전시청 등이 이전하면서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된 것은 대전 시민들은 다 아는 사실. 대전 시민들에게 전통적인 대전의 중심지, 도심은 중앙로이다. 그렇다면 중앙로는 원래부터 대전의 중심지였을까.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1905년 1월1일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대전역이 본격 영업을 시작하기 전 지금의 중앙로 일대는 민가가 몇 안 되는, 논과 밭뿐인 한가로운 농촌의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현재의 중앙로 일대를 비롯한 주변지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 지명인 ‘한밭’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이 같았던 대전역과 대전천, 중앙로 일대에 대전역 개통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해 일본인들 거류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자 이들을 위한 식당, 여관 등 숙박업소, 경찰 주재소, 헌병대 등이 자리 잡으면서 도심 타운이 형성된 것이다. 즉 이 같은 서비스 시설이나 치안유지 기관은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지 한국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경부선 철도 개통 전, 더 거슬러 올라가 조선시대 또는 구한 말이라고 불리는 시기에 대전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회덕’(懷德)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회덕이라는 이름은 논어에 나오는 ‘대인회덕 소인회토’(大人懷德 小人懷土·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라는 말을 인용해 생긴 것이라고 송백헌 박사(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송 박사는 회덕이라는 지명이 풍수지리적 특성 등에 따라 지어진 것이 아니라 ‘덕을 품은 대인이 나오기를 염원한다’는 옛 성현의 말씀에서 따온 것이라고 송 박사는 덧붙인다. 즉 우암 송시열 선생을 비롯한 명현들이 이 지역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가리키는 말로도 해석된다.

현감 또는 원님이라고 불리던 행정수장이 행정을 집행하고 기거하던 회덕현청이 현재의 대덕구 읍내동(邑內洞)에 있었으며 주변에 지역행정을 위한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덕구 읍내동이 읍(邑)의 한 가운데라는 뜻의 읍내동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경부선 철도 개통 전 대전의 중심지는 현재의 대덕구 읍내동뿐만 아니라 읍내동을 에워싸고 있는 원촌동, 와동, 연축동, 중리동, 법동, 송촌동 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이곳 주민들의 말이다. 지역행정을 위한 기관뿐만 아니라 제월당·동춘당 등 우리나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문가를 비롯해 지역유지 등이 이 지역에 살았다.

회덕현청의 흔적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회덕현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대덕구 회덕동사무소 뒤편 골목으로 들어간 다음 몇몇 주택과 경부선 철도 사이 공한지이다. 이 공한지는 담이 둘러싼 나대지 형태로 남아 있는데, 나대지를 담이 둘러싼 이유에 대해 이곳의 소유주가 고물상을 운영하기 위해 쳐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인근 주민들은 말했다.

회덕현청은 조선시대 각지에 있었던 현청들이 그렇듯 이방·형방 등 향리들이 사무를 보기 위한 시설과 현감이 집무하는 동헌, 그리고 죄수들을 수용하기 위한 감옥, 창고 등 부속시설이 한군데 모여 있어 규모는 작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이 가리키는 나대지 외에 인근의 주택,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철도부지정도는 회덕현청 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덕현청 추정지에서 큰길 쪽으로 100여m 떨어진 회덕동사무소 주차장에는 한눈에 봐도 1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비석들이 서 있다. 이 비석들은 어진 행정을 편 회덕현감들의 공덕비들이다.

또 회덕동사무소에서 읍내동 사거리 쪽으로 내려오면 바로 대덕문예회관과 대덕문화원이 나타나는데, 대덕문예회관 바로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회덕초등학교는 회덕현청 부속 곡물창고 자리였다는 것. 읍내동에서 원촌동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야산은 당산으로, 과거 현감이 주재하는 각종 제사가 봉행된 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회덕현청 자리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멀지 않은 곳에 회덕향교도 자리 잡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나타나고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도 옛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다. 신탄진으로 향하는 읍내동 17번국도변 제월당, 송촌동에 있는 동춘당 등 고택은 문화재가 많지 않은 대전에서는 손꼽히는 유형문화재들이다.

대덕구 읍내동에서 태어나 읍내동 지역에서 성장하고 줄곧 살아 왔다는 임창웅 대덕문화원 사무국장은 일본 제국주의가 회덕현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에 경부선 철도가 지나게 하고, 현 대전의 중심지가 원래 중심지였던 회덕이 아닌 중앙로 일대로 형성되도록 한 것은 다분히 고의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경부선 철도가 회덕현청을 지나고 읍내동을 가로지르게 한 것은 당시 대전의 중심지, 지역의 최고 행정기관이 있었던 읍내동 일대를 둘로 갈라놓아 쇠락케 하고 지기(地氣)를 꺾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임창웅 국장은 “일본이 한때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총칼로 통치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전지역의 중심지였던 읍내동 등 회덕을 대전의 도심, 행정의 중심지로 그대로 유지·발전케 할 수도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대전역을 회덕 일대가 아닌 현재의 동구 중동에 설치하고 경부선 철도가 읍내동 등을 가로지르게 한 것은 성현과 우국지사들이 많이 배출된 이곳의 기운을 꺾기 위한 일제의 의도적인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임 국장은 이어 “대전시무형문화재전수회관이 준공된 동춘당 주변은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못지않은, 대전의 자랑한 만한 민속마을로 개발할 수 있을 만큼 큰 기와집과 초가집, 주변에 논과 밭 등이 많이 있었다”면서 “주변에 송촌동 아파트 3단지 등이 개발되기 전, 민속마을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선행됐더라면 빼어난 고택이자 문화재인 동춘당을 중심으로 한 대전 도심 속 민속마을로 유명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자각이 좀 더 빨리 일어났더라면, 대전은 계족산과 어우러진 도심 속 민속마을을 가진 대도시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적어도 100년 전까지 대전의 명실상부한 중심지는 회덕이었던 셈이다. 중앙로 일대가 대전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의도에 따른 셈이며 둔산 신도시가 새 도심으로 부각된 것은 대전시와 당시 정부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즉 100년의 기간 동안 시류에 따라, 정책에 따라 대전의 중심지는 세 번 옮겨진 셈이다.

근대적 도시로서의 역사는 경부선 철도 개통 이후 104년이지만, 선사시대부터 기름진 땅을 찾아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아왔으며 백제시대에는 신라와 대치하고 있던 최전선 국경도시였고 조선시대 성현들이 배출되고 살았던 대전. 대전은 이제 150만 인구를 가진 중부권 중핵도시, 과학기술도시로 문화의 도시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끝>

글 류용규 기자 realist@daejonilbo.com

사진 빈운용 기자 photobin@daejonilbo.com

자료사진=대전일보 DB·대덕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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